[♡ 마음 공부 ♡]/법륜스님 법문

자유로운 삶 - 진정한 자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걸가.

혜등명 2009. 9. 12. 14:33

<굴레를 벗어나는 삶 - 자유> "자유로운 삶"

 

법륜스님

-정토회 수행공동체 지도법사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것들로 많은 속박을 받습니다.

즉 이런저런 것들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모든 것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가

이번 강좌의 큰 주제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유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여러분들이 가장 자유롭지 못한 부분,

죽음을 가지고 먼저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다 부모로부터 나온 자식이니까 부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질문자 중 두 분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헤어나지 못하는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사랑하는 남편을 갑자기 잃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아들의 죽음 남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가슴 아프죠. 어떤 위로를 해도 위안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겪어가며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다 죽는다.

우리도 다 알고 있어요. 이렇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부모의 죽음,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의 죽음은 너무너무 가슴 아프고 헤어날 길이 없죠.

 

(중략)

슬픈 것도 남이 볼 땐 슬픈 일이 아닌데 본인은 슬퍼요. 괴로운 것도 남이 보면 괴로울 일이 아니데 본인은 괴로워해요.

화나는 것도 남이 보면 별로 화낼 일이 아닌데 본인은 화를내요. 왜 그럴까,

바로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또 반대로 이렇게 자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한 생각 돌이키면 깨닫게 돼요.

근데 남의 문제 구경하는 사람은 아무도 깨닫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어리석음도 자기 문제고, 깨달음도 자기문제요.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은 아무 필요가 없어요.

 

죽은 소에게 "소야, 풀을 먹어라"하면 소에게 도움이 됩니까, 안 됩니까? 내가 평소에 소에게 꼴을 제대로 안줬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라도 은혜를 갚아야겠다. 내가 뉘우치고 참회해서 이렇게 하면 소에게 도움이 됩니까, 그럼 나한테는 도움이 됩니까?

부모님이 나를 키우고 아끼고 사랑했어요, 근데도 나는 부모님의 은혜를 몰랐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너무너무 후회가 돼요. 그래서 부모님 무덤을 크게 만들었다, 부모님에게 도움이 됩니까, 장례를 잘 치렀다, 도움이 됩니까,

음식을 잘 차려 가지고 매일매일 공양을 올린다, 도움이 됩니까. 무덤가에 초막을 치고 삼년을 살았다, 도움이 돼요? 정말 부모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형제간에 다투면서 가족은 돌보지 않으면서 부모 무덤가에 앉아 매일 울고 있는 걸 부모가 원하는 걸까요? 있는 가족 잘 돌보는 게 부모가 원하는 바겠지요.

 

이 모든 건 사랑이 아니에요. 까르마, 제 습관 , 제 식대로 그냥 하는 거예요.

전도몽상, 자기 생각에 사로잡힘, 거기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게 미친 상태로부터 정신차린 상태, 꿈으로부터 깨어난 상태, 어리석음으로부터 깨달은 상태, 그것이 깨달음이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중략)

인간이란 항상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존재다. 인간은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

그래서 우리를 '범부중생'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줄 알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데 지혜로운 줄 알면 깨달을 수 없어요. 욕심 많은 사람이 내 욕심 많은 줄 알아야 욕심을 버리지, 내가 사랑 안하는 줄 알아야 사랑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이렇게 스스로가 속고 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전도몽상이라고 그러는 거요.

여기로부터 이제 여러분들이 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중략)

그 일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바람과 관계없이 일어났다, 내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이말이에요.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진 것도 아니고 일부러 넘어진 것도 아니고 일단 넘어졌다 이거에요. 일단 넘어졌는데 성질이 나서 돌부리를 발로 차버린다면 누구 손해요, 자기 손해죠.

이왕 넘어졌다면 '아이고, 이 돌부리 때문에 넘어졌구나. 애들이 놀다가 앞으로 나처럼 넘어질 애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얼른 호미를 가져와서 그 돌부리를 캐서 없애면

이것은 안 넘어진 것 보다 결과가 더 나아지죠.

그럼 나아지려고 넘어진 거예요? 그건 아니죠. 넘어지긴 넘어졌는데 그걸 어떻게 그 다음 단계로 나가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안 넘어진 거 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가 있다 이 말이에요.

 

넘어진 거는 행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에요. 넘어졌다는 그냥 하나의 사건이에요.

근데 그것을 내 생각에 사로잡혀서 돌부리를 발로 차는 쪽으로 가면 불행이 되고 화를 자초하고 아이들을 생각해서 돌부리를 캐내는 쪽으로 가면 복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닥친 그 어떤 것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재앙이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한다 이거에요.

그 일은 일어나지 마라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안 일어나면 안 일어난 대로 좋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좋다 이거에요.

 

즉 남편이 건강하고 아내가 건강하고 자식도 건강하면 그것도 좋은 일이고 인연을 따라 돌아가시면 그것도 좋은 일이에요.

내가 죽이거나 죽으라고 한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자유를 얻느냐는 문제, 그건 타인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에요. 나의 문제지. 여러분들이 갖는 모든 속박은 지금 자기가 만들고 있는 거요.

 

자식 때문에 못 가는데 남편 때문에 못 가는데, 부모 때문에 못 가는데, 장사 때문에 못 가는데,

묶어놔서 못 가는 게 아니라 못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걸 붙들고 있는 거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법이라는 게 바로 양쪽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눈을 떠야 이 불법의 위대함을 알지요.

 

자기 향상의 길이 열리는 게 남을 고쳐서 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고쳐져야 돼요.

 

자기가 고쳐지려면 첫째 제 꼬라지를 알아야 해요. 뭘 고칠지 안 고칠지를 점검을 해야 돼요.

안 고쳐도 되는 걸 고치겠다는 건 쓸데없는 짓이에요. 고칠 거를 모르고 있다. 이거 정말 어리석은 거예요.

자기 점검을 먼저 해야 돼요. 자기 점검.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굉장히 열등의식 속에 살았는데 점검을 해보니 고칠 필요가 없는 거요.

오히려 굉장한 장점이야, 그럼 이런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돼요.

반대로 굉장히 잘한다고 했는데 자기점검을 해보니 피해를 가져온다면 이건 버려야 해요.

건강 체크 하듯이 이렇게 자기 인생에 대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이게 점검이 안 되면 맨 부모타령, 남편타령, 자식 타령, 친구 타령 세상타령 이러다 만다 이거에요.

세상이 어둡다 할 때 내가 먼저 눈을 떴는지 안 떴는지 점검하는 게 중요하다 이 말이에요.

눈을 떴는데도 세상이 잘 안보이면 불을 켜야 돼요. 근데 벌건 대낮에 눈 감고 어둡다고 고함을 쳐대면 이건 해결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서 여러분들이 자유로워집니다.

 

우리의 자유는 남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야 됩니다.

 

누에고치가 스스로 자기 입에서 나온 실로 고치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갇혀 번데기처럼 굳어있죠.

그게 오늘날 우리 중생이에요. 자기가 일으킨 생각에 꽉 사로잡혀가지고 꼼짝도 못하고 살고 있는 것,

마치 나방이 그 고치를 뚫고 밖으로 나와서 세상을 훨훨 날듯이 여러분들이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 울타리를 벗어나면 마치 나비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 거기서 중요한 게 종교, 윤리, 관습, 계율 습관, 이런 것들이 우리를 얽매고 있다 이 말이에요.

거기에 갇혀서 여러분들이 늘 속박 받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늘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된 다 안 된다 하는 그런 속에 살고 있어요.

이것이 여러분들이 자유로 나가는데 큰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자기 점검을 통해 자기 문제, 자기 속박의 원인을 아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아는 것과 고쳐지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알아도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반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점검을 해야 돼요. 매 순간 매 순간 점검하면서 놓쳤을 때는

알아차리면서 다시 하고 다시하고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걸 수행이라고 해요.

 

엄격하게 말하면

자기가 도달해야할 목표와 자기 선 위치를 정확하게 점검하고 난 다음에 그가 가는 것을 우리가 수행이라고 말하지, 목표도 점검이 안 되고 자기 위치도 점검이 나 되고 그냥 가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이것은 헤매는 거예요.

 

동서남북 구분도 못하고 그냥 하는 거. 절하니 좋다고 하니 절하고 경 읽는 게 좋다하니 경 읽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헤매는 중이지 그건 수행이 아니에요.

 

그래서 첫째 자기 점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붓다가 가르친 인생의 목표, 해탈과 열반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그 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내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점검하고 그 방향을 향해 과정을 거쳐서 나가야하는 겁니다.

그 나가는 길이 '바라밀다'입니다. 이 괴로움이 있는 세계로부터 저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건너간다, 이게 바라밀이란 말이에요. 건너가는 데 여섯 가지 방식이 바로 육바라밀이고 열 가지 방식이 십바라밀입니다.

거기 여덟 가지 길이 있다, 이건 팔정도지요.

 

이런 것 없이 공부를 하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어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절에 다니면 뭐하노'라고 힐난을 받죠. 아내나 남편 부모나 자식으로 부터도.

 

그러니까 자기 인생을 아끼고 사랑해야 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해 주겠어요.

내가 나도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남을 사랑하겠어요.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겠으며

내가 나도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겠어요.

 

그러니까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해야 된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려면 내가 내 자신에 대한 점검이 먼저 있어야 돼요.

 

나 아닌 것으로 나를 삼고 거기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무덤가에서 삼 년이나 울고불고 한 거와 같다 이거에요.

자기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건 부모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자식들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이 세상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어쩌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자신은 그걸 모릅니다.

자신은 오직 부모를 위해서 한다는 그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좀 새로운 생각을 내셔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기 바랍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jungtobms/NCrC/9

법문 : 2007년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굴레를 벗어나는 삶- 자유" 중 제 2강

법문발췌 : Daum "인터넷♡열린법회" 카페 계정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