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공부 ♡]/법륜스님 법문

<굴레를 벗어나는 삶 - 자유> 외로움과 고독의 삶을 넘어 (펌)

혜등명 2009. 9. 29. 22:03

제3강 <굴레를 벗어나는 삶-자유> '외로움과 고독의 삶을 넘어'

 

혼자라서 외로움이 느껴지는 게 아니고,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외로움이 느껴진다.

 

내가 일 년 후에 죽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고 일 년 후에 죽는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괴롭다 이런 얘기에요.

남편이 술을 먹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고 남편 술 먹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남편이 술을 먹으면 내가 괴로워진다.

 

사실은 내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괴로움이든, 슬픔이든, 외로움이든,

 미움이든 이런 것이 생겨난다. 그래서 이 괴로움은 그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나로부터 일어나는 거다.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만들어 놓고 그로부터 온다고 착각하고 있다. 전도몽상(顚倒夢想)

 

꿈속에서 뱀을 봐서 놀랐다. 그래서 내 이 놀람이 뱀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뱀은 없다.

나의 착각으로부터 일어난 거다 이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혼자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여러 사람과 같이 있어도 고독이 느껴지고

내가 혼자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혼자 있어도 아무런 외로움이 없다, 이런 얘기에요.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실제로는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연기법(然起法), 무아(無我)

 

저 땅속에 있는 지렁이와도 나는 연관되어 있고 저 꽃들과도 연관돼 있고 저 해와 달, 별들과도

사실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연관을 보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여기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있는데 이 다섯 개의 손가락은 한 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보는 눈을, 시각을 아주 좁혀서 보면 아주 작은 구멍으로 보면

이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한꺼번에 안보입니다. 엄지 밖에 안 보입니다.

그러다가 이동해 가면 없다가 다시 두 번째 손가락이 보이고 다시 한참 있다가

세 번째 손가락이 보이고 다시 한참 있다가 네 번째 손가락이 보이고 다시 한참 있다가

새끼 손가락이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손가락이에요.

다섯 개가 각각 별개다 이 말이에요.

다섯 개의 손가락이 각각 별개라면 이 두 번째 손가락이 없어진다고 해서

첫 번째 손가락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그냥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너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고 너의 죽음을 나의 삶의 기반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너의 손해를 나의 이익으로 삼을 수가 있다 이거예요.

너의 존재가 나와 무관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런 사고방식에 젖어있습니다.

 

우리들의 각각의 존재는 마치 한 바구니 안에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조약돌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

그 바구니 안에 든 조약돌 몇 개를 던져 버린다고 해도 내 조약돌은 그냥 있다 이거에요.

각각의 관계가 무관하다 이겁니다.

이것을 홉스는 사회를 얘기할 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경쟁하고 경쟁해서 이기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승리하고 패배하고

승리하면 행복이고 패배하면 괴로움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이 우리나라와 너희나라, 우리 민족과 너희 민족, 우리지역과 너희 지역 아니면

우리 가족과 너희 가족, 더 좁히면 부부지간에도 나와 너.

이렇게 다 별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는 눈이, 시야가 아주 좁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부분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야를 넓히면 어떠냐, 시야가 좁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가려져 있기 때문에

가려진 부분을 모지 못하기 때문에 다서 개 손가락을 별개라고 볼 수가 있다.

 

이 가려진 것이 벗겨지면, 좁은 시야를 넓히면 이 다섯 개의 손가락이 각각 독립된

모양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서로 연결 돼있다. 한 손에 연결돼 있다.

손가락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손가락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연결 된 전체, 손을 중심에 놓고 볼 때는 다섯 개의 손가락은 서로 다른 손가락이 아니라

한 손의 다섯 손가락입니다.

서로 다른 손가락일 때는 너의 죽음이 나의 삶과 무관한데 한 손의 다섯 손가락일 때는

한 손가락이 없어지면 다른 손가락은 불편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됩니다.

실제의 세계는 이러합니다.

 

그러면 오른 손과 왼손의 관계는 어떠냐, 이것은 완전히 별개 같은데 이것도

한 몸뚱이에 연결 돼있다. 이것까진 되는데 나와 너는 어떠냐, 이것도 다 연결된 부분이

안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비유를 들어 얘기를 하면 나무를 생각해 보자.

나뭇잎과 나뭇잎 하나하나는 어때요. 별개입니다. 한 나뭇잎이 떨어져도 다른 나뭇잎에

별 영향은 없죠. 근데 사실은 그 나뭇잎은 가지에 연결 돼있습니다. 가지를 잘라 버리면

두 나뭇잎은 동시에 죽어 버립니다. 그러면 이 가지와 저 가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가지를 잘라 버린다고 해도 저 가지는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줄기를 자르면 어때요, 이 가지든 저 가지든 동시에 죽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가지는 나무줄기로 연결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뿌리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면 나무뿌리하고 땅은 어떠냐, 나무 뿌리와 땅은 별개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뿌리가 있고 거기에 잔뿌리가 있고 거기에 솜털 같은 뿌리가 있고 더 끝부분에 가면

나무뿌리와 땅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바로 땅 속에 물이 있고 그 물 속에 요소들이 녹아있고

그것이 나무뿌리를 타고 줄기를 타고 잎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땅이 나무가 되고 있다. 나뭇잎이 떨어져서 땅으로 돌아가고.

땅과 나무는 연결이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까지는 우리가 조금만 설명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 이 연결고리가 고체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또는 액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고체와 액체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나뭇잎이 공기와 연결돼 있다.

공기와 허공과 연결돼 있다. 기체는 우리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연결 된 선을 볼 수가 없습니다. 물질에는 고체가 있고 액체가 있고 기체가 있습니다.

만약에 물을 가지고 설명을 하면 물 분자가 질서정연하게 서있으면 얼음이고

그것이 자유롭게 움직이면 액체고 그것이 분자와 분자 사이가 떨어져서

움직이면 기체, 수증기입니다. 물체 자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에너지가 들어오면 운동성이 커지고 에너지가 떨어지면 응고 됩니다. 그 차이밖에 없어요.

우리 눈이 그것을 알아차릴 때 분자와 분자가 결합되어 있는 것은 인식이 되고

분자와 분자가 떨어져 있으면 눈이 그것을 인식을 못 할뿐이에요.

눈이 인식을 못하니까 우리는 없는 줄 압니다.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에요.

내 눈에 보인다고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내 눈에 안 보이는 것도 착각을 일으켜서

내 눈에 보이는 수도 있고 있는 것도 내 눈에 안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있어서

있는 게 아니고 없어서 없는 게 아니고 없어도 눈에 인식이 되면 있는 게 되고 있어도

눈에 인식이 안 되면 없는 게 되는 거요.

그러면 이 나무가 허공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검정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나무를 비닐로 꽉 움켜 싸서 공기와 차단을 시켜보면 이 나무는 죽습니다.

무슨 연결고리를 끊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아닌지를 아는 것은 간단합니다.

입을 막고 항문을 딱 막아 버리면 죽습니다.

수돗물처럼 계속 연결돼 들어오고 연결돼 나갑니다.

그러면 이 나무가 기체인 공기와 연결돼 있다. 근데 이 나무는 저 태양과 연결돼 있습니다.

태양 빛을 차단하면 죽어 버립니다. 파동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파로 연결돼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잘 알잖아요. 유선전화기는 선으로 연결돼 있죠. 핸드폰은 선으로

연결돼 있는 게 아니에요. 전파로 연결되어 있어요. 선을 가위로 끊어버리면 통하지 않는 것처럼

파도 집이나 건물이나 산이 가로막혀서 차단이 되면 전화가 안 통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옛날 경험, 어리석을 때, 무지할 때의 경험 오직 연결이라고 하는 것은

고체와 액체의 연결 밖에 생각을 못하는 거요. 기체도 물질이고 파도 물질이에요.

 

이렇게 우리는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로울래야 외로울 수가 없다 이거에요.

 

우리 몸속에 있는 세포는 수십조개가 서로 연결돼서 몸을 구성하죠. 근데 어느 한 세포가 외롭다,

이건 외로울 수가 없어요. 수십조 개가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외로워요.

나 혼자다, 혼자일 수가 없어요. 그럼 이 혼자다, 이건 뭐요,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있다

이런 뜻이에요. 이 혼자라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이 연관되어 있는 실상을 여러분들이 안다면

여러분들은 들녘에 가만히 혼자 앉아 있어도 수많은 친구들, 뭇 생명들과 더불어 춤추고

놀 수가 있어요. 깊은 산속에 홀로 앉아 있어도 사실은 홀로가 아니에요.

온갖 것들과 더불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생각을 일으켜서 차단시키는 것,

나는 혼자다라고 차단시켜 버리면 부부가 한 이불 밑에 누워있어도 외롭고 고독감을 느낍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지구 저 반대편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그의 마음이

내 가까이에 있다 생각하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곁에 있어도 부처님을 모시고 있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도무지 부처님과 상관없는 자가 돼요. 부처님 열반하신 후에 수천 년이 흐른다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해서 살면 늘 부처님과 함께 사는 게 됩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길을 가다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복잡하게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고독감을 느끼죠, 이걸 '군중 속에 고독'이라 그래요.

옛날에 우리 부모들은 남편이 멀리 가서 5년 10년씩 떨어져 있다 돌아와도

다 혼자서 애들 키우고 잘 살았어요. 외롭다니, 고독하다니, 이런 말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근데 요즘은 한 이불 밑에 자면서도 외롭고 고독해요. 세상에는 오직 나 혼자 밖에 없는 거 같아요.

이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요, 결혼을 안 한 처녀 총각으로 있기 때문도 아니고 아내나 남편이

나를 몰라주기 때문도 아니요.

내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내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혼자 있다고 결혼을 하면 이 병이 낫겠냐, 그렇지 않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사람들하고 같이 사는 것이 너무 귀찮아서 혼자 살고 싶어,

어디 조용한데 가서 혼자 좀 있고 싶어. 그래서 혼자 있는다고 이게 해결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느껴지는 거요. 사람들이 아무리 같이 있어도

복잡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너무 복잡해서 귀찮다는 것과 혼자 있어 외롭다는 것은

정 반대인데 심리 현상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으면 외롭고 둘이 있으면 귀찮고 헤어져서 혼자 있으면 또 외롭고

또 사람 만나 같이 있으면 또 귀찮고. 그래서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합니다.

 

옛날에는 만났다 하면 못 헤어지게 했는데 요즘은 한 번 쯤은 해도 된다, 조금 있으면 두 번쯤은

해도 된다, 요즘은 세 번 네 번. 옛날에는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사람이 백 명 중에 한 명도

안 되었는데 요즘에는 네 다섯 번씩 하는 사람도 백 명 중에 한 명씩 나온다.

이렇게 자꾸 자꾸 헤어져서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앞으로 평균 결혼 생활이 2,3년을

못 넘기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이렇게 됩니다. 실제로 미국 같은 데서는 이렇습니다.

제가 만난 미국사람은 7년을 살고 이혼을 했답니다. 그럼 왜 헤어졌냐 했더니 7년 살면

많이 산겁니다 하더군요. 보통 동거하다 헤어지고 동거하다 헤어지고 2,3년 살면 헤어지고

또 2,3년 살면 헤어지고 그래서 나중엔 결혼을 안 하게 되죠. 결혼을 했다 헤어지면 재산 문제도

복잡하니까 결혼을 안 하고 동거를 많이 하지요. 이게 다 귀찮고 외로움을 밖으로 극복하려다가

생긴 문제예요. 해결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외롭다고 앞으로 만나고 귀찮다고 헤어지고 해도

유럽처럼 갈수록 귀찮고 외롭고가 더 심화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돌아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외로움을 극복하느냐, 외로움은 혼자이기 때문에 오는 게

아니다,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세계는 혼자가 아니다. 수도 없는 존재들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인드라의 그물이라 그래요. 인드라망. 이걸 한문으로 하면 제망(制網),

예불 할 때 제망찰해란 말 있죠 제망, 제석천의 그물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된 한 그물코와 같은 존재예요.

다시 정리하면 외로움은 나 혼자 있기 때문에 오는 게 아니다.

귀찮음은 같이 있기 때문에 오는 게 아니에요.

외로움은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과 함께 있어도 마음의 문을 닫으면 외로워집니다.

귀찮은 것은 상대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거요. 그러니까 싫어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옆에

고양이가 있어도 귀찮고 강아지가 있어도 귀찮고 나중에는 정원 가꾸는 것도 귀찮고 방에

무슨 물건 여기저기 있는 것도 귀찮게 돼요.

그러므로 사람이 옆에 있기 때문에 귀찮아지는 게 아니다. 그가 성가시게 굴기 때문에

귀찮아지는 게 아니다. 내가 그를 싫어하기 때문에 귀찮아진다.

 

자, 이런 원리에서 여러분들이 외롭다고 사람을 만나러 가고 귀찮다고 헤어지고

이렇게 선택을 하지 말고 자기 정진을 먼저 해라. 외롭다고 느끼면 108배 절을 해라.

귀찮다고 느끼더라도 헤어지지 말고 먼저 108배 절을 해라. 알았어요? 108배 절을 해서

안 되면 천 배를 하고 천 배해서 안 되면 삼천 배를 하고 삼천 배를 해서 안 되면 만 배를 하고.

그러면 귀찮다는 생각도 사라져 버리고 외롭다는 생각도 사라져 버립니다.

외롭지도 않고 귀찮지도 않아야 합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여럿이 있어도 귀찮지 않아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유로워집니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데 현실은

둘이 있어야 된다 그러면 귀찮아지는 거요.

나는 같이 있고 싶다 하는데 현실은 혼자 있을 수밖에 없다 하면 외로워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인연에 따라 혼자 있을 수도 있고 둘이 있을 수도 있고

여럿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 어떤 것을 고집하면 안돼요. 혼자 있을 때는 혼자 있어서 좋고

둘이 있을 때는 둘이 있어서 좋고 여럿이 있을 때는 여럿이 있어서 좋다.

좋다는 말은 내가 그것을 선호 한다 는 말이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이때 좋다는 의미는 그 어떤 거든 다 있는 그대로 좋다는 거요. 그대로.

 

그럴 때 여러분들이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 고독은 특히 자기 에고, 자기 고집, 자기 견해가 옳다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실은 고독감이 커집니다. 또 자기 이해관계가 밝으면 밝을수록 역시 고독감도 커집니다.

자기 견해를 고집하면 다른 사람과 부딪히게 되고 부딪히게 되면 헤어지게 되죠.

고집하는 거도 남과의 관계에서 생기는데 고집하면 남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근데 고집하는 이유는 뭐예요, 남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를 옳다고 주장해야 그 본때가 나는

거란 말이에요. 관계가 끊어져 버리면 그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그러기 때문에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즉 이 사람은 자기를 고집하지마는 남하고 같이 있고 싶은 거요.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같이 있고 싶은데 자기를 고집하는 거, 같이 있고 싶은데 자기 이익만 주장하는 거,

이건 같이 있을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바로 전도몽상이다 이거요.

그건 해결되어질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타인과 같이 있고 싶다 할 때는 상대가 이익이 돼야 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우리가 더불어 같이 사는 데는 다섯 가지를 꼭 지켜야 된다고 하셨어요.

상대를 해쳐서는 안 된다. 상대를 살려야 한다.

상대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상대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

상대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상대를 기쁘게 해야 한다.

상대를 속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상애에게 진실을 밝혀줘야 한다.

뭐든지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욕심을,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적당히 절제해야 된다.

이게 바로 소극적으로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소극적으로는 해치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소극적으로는 뺏거나 훔치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소극적으로는 괴롭히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기쁘게 해주고 소극적으로는 속이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진실을 말해 주고 소극적으로는 술이나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되죠.

여기에 지나치게 먹지 마라, 술만이 아니라 음식이든 지나친 것은 다 해악이 된다.

그래서 사람은 일정한 자기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것이

남을 위하는 길인 동시에 누구를 위하는 길이다. 나를 위하는 길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를 위하고 남을 위하고.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살이가 이렇게 괴로운 거예요.

내가 난 자식하고도 갈등이 생겨서 괴롭고 내가 좋아서 만나 결혼해서 사는 부부지간에도

갈등이 생겨서 괴롭고 나를 낳아준 부모, 나를 키워준 부모하고도 갈등이 생겨서 괴롭잖아요.

조금 더 보충을 하면 여러분들이 또 반대로 부부가 결혼 하면 너무너무 행복하다,

자식을 낳으면 너무너무 좋을 거다. 이렇게 지나친 기대를 해도 경과가 나쁘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는 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혼자이면 외로워지는 거요. 사실은 둘이 있어야 된다느니, 혼자 있어야 된다느니

하는 거는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날이 맑아야 된다, 흐려야 된다는 거는 없어요.

때로는 흐리고 때로는 맑은 거요.

농사지으려면 비가 와야 되고 곡식이 익으려면 맑아야 되요.

그러니까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날씨가 맑으면 맑아서 좋다.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면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도 많습니다. 지금 기상이변이라 해서 겨울이 따뜻해서 온갖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추운 거는 추운대로 좋은 게 있고 더운 거는 더운 대로 좋은 게 있어요.

 

그것처럼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혼자인 경우는 혼자여서 좋고

둘인 경우는 둘이 있어서 좋다. 부모를 모신 사람은 모실 수 있어서 좋고

또 부모가 없는 사람은 모시지 않아서 좋다 이래야 되는데

부모가 없는 사람은부모를 모시고 싶은데 부모를 모시고 싶어서 남의 부모를 데려다가 부모로 삼고

또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부모를 모시기 싫어서 있는 부모를 저 갔다 버리고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이 괴로움 덩어리라고 그러고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을 만들려고 대리모까지 고용을 하고

그것도 안 되면 강아지로라도 대신하고 이러니까 복잡한거요. 여러분들이 외롭다고 강아지로

대용물을 삼다보니까 앞으로 이것도 큰 문제가 됩니다. 그 강아지 예쁘다고 키우다가 길거리에

버려놓고 또 잡지는 못하게 하고 고양이도 그렇고, 이 굉장한 모순이에요.

그래서 공원에 가보면 온 천지 개똥이고 요즘은 도둑고양이가 많고 지금 유럽 같은 데는

강아지 때문에 비용이 엄청나죠. 여러분들 도시에서 강아지 한 마리 키우는 비용이면

저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어린 아이들 열 명이나 백 명 키우는 경비로 씁니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을 잘못 써서 생긴 마음의 병을 자꾸 바깥 문제를 어떻게 해서 이 문제를

풀려다 보니까 부작용이 부작용을 낳고 부작용이 부작용을 낳고 이래요.

이런 것들이 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에 기초해서 세상을 바꾸게 되니

이것이 세상의 발전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을 더 괴롭히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행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 따라 정진을 하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아요.

어디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명상하기 좋아요.

또 여러 사람하고 같이 있을 시간이 있으면 그것도 좋아요.

 왜, 사람만 보면 교화를 해야 하니까 또 사람만 보면 봉사를 해야 하니까요.

 또 보시도 해야지, 복을 지어야 되니까.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면 복 지을 기회가 생기고 혼자 있으면 수행 할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상구보리 하와중생을 혼자 있을 때는 상구보리하고 둘이 있을 때는 하와중생한다.

이래도 수행이고 저래도 수행이요. 그러니까 돈이 있으면 보시하기 좋고 돈이 없는 사람은 버릴게

없어요. 여러분들이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버리기가 쉬워요.

그런 것이 자유에요, 자유.

그러니까 외로움은 반대가 귀찮음인데 외롭지도 않고 귀찮지도 않은 거요.

할 일이 없으면 한가해서 좋고.

 

다시 말씀 드리면 오늘은 고독에 대한 주제니까 혼자 있으면 혼자 있어서 좋다.

그럼 혼자 있어서 좋으려면 수행에 어떤 목표가 있어야 그리 되겠죠.

그런 게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혼자 있으면 책보고 명상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심심해요, 그건 게으른 사람이죠.

또 어떤 사람은 일이 없으면 못 견디는 사람이 있어요. 일이 없으면 뭔가 허전하고

사회에 뒤처지는 것 같고 그렇대요. 아니에요 일이 없으면 십년이라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돼요.

달마대사는 법을 전하러 왔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법을 안 전하고 다들 장사속으로 오니까

9년을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여러분들이 한가할 수 있어야 해요. 또 요구가 많으면 바빠야 돼요.

근데 그 바쁜데 중심이 없으면 정신이 없어져요. 그러기 때문에 복 짓는다하는

이런 목표가 있어야 돼요. 중생을 교화한다 하는 목표가 있으면 그것은 귀찮거나 경계에

휩쓸리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어도 좋고 여럿이 있어도 좋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여럿이 있어도 귀찮지 않다. 혼자 있으면 수행하기 좋고

여럿이 있으면 복짓기 좋다, 이런 목표가 있어야 돼요.

 

 

여러분들은 대부분 상처를 입었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이것은 조금만 공부하면 금방 치유가 됩니다.

근데 여러분들이 상처를 준거는 여러분들이 노력한다고 쉽게 치유가 안 돼요.

제가 얘기하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데 결과적으로 이익이 된다 이런 얘기예요.

같이 사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되고 혼자 사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돼요.

안 그러면 원한에 사무치고 매달리고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돼요.

진짜 어떤 게 이롭나를 생각해야 된다 이거예요.

 

아무리 사람들이 영악하게 사는데도 결과가 나쁘니까 왜 그럴까 하고 연구를 해봤더니

생각을 잘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 결국은 자기에게 이롭다 이거요.

혼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도 있지마는 같이 있는데도 외롭다 그것은

자기 에고가 너무 강하면 군중 속에 고독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에고를 여러분들이 내려 놔야 돼요.

늘 내가 말하잖아요. 상대를 이해하면 누구 마음이 시원하다, 내 마음이 시원하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누구 마음이 답답하다, 내 마음이 답답하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나에게 좋다. 그 사람에게도 좋다. 여러분들이 애들 이해해 주고

남편 이해해주면 애나 남편이나 좋아하지, 그럼 그들을 위해서 내가 희생한 거요, 아니요

내가 이익을 먼저 챙기고 떡고물 조금 준거요. 그 사람들도 떡고물 먹고 아주 좋아하는 거요.

근데 가끔은 그 떡고물 먹고 좋아하는 게 얄미워 가지고 난 떡도 안 먹겠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은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해나가면 이게 바로 생사여탈, 여러분들이 고뇌하는 중생 속에 있으면서

중생에 물들지 않고 생사가 있는 중생 속에 있으면서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한가하면 한가한대로 바쁘면 바쁜대로 분별하지 않고 그대로 여여하게...

스님의 법문은 들을면 들을수록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안내를 정말정말 훌륭하게 잘 해주시는 것 같아요.

덕분에 여러 바쁜 상황, 힘든 상황 속에서도 중심키를 잘 부여잡고 항해를 하고있습니다.

간혹 항해 중에 멀미가 날 때도 있지만 명선장은 그런 와중에 길러진다 하잖아요.

스님께서 건네주시는 멀미약도 어찌나 약발이 좋은지..^^

법문을 통해 전해주시는 부처님의 바른 법이  제 삶속에 자연스레 흐르도록

잠에서 깨어나듯 삶에서 깨어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 배에 승선하신 모든 분들과

감사와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함께 하길 발원하며

아래의 시는

성적으로 인해 치열한 경쟁구도로 내몰리는

중학생 아이들과 함께

자연과 교감하며 함께 호흡하며 본연의 마음으로 돌아와

마냥 행복해 하던 소중한 순간을 글로 담아보았습니다.

 

 

<솔향 그윽한 소나무 그늘 아래 >

 

솔향 그윽한 소나무 그늘 아래 
쑥스러워 헤죽거리는 중학생 아이들,

꾸룩 꾸룩 꾹구르륵 모여드는 비둘기들,

나뭇가지에 걸린 한조각 흰구름과

함께 한 찻자리

아이들과 마음 나누기  중
한 어린성자의 분별심을 일깨우는 따끔한 일구(一句).

'형제의 머리를 비교하면 양쪽을 다 죽이지만,
형제의 개성을 비교하면 양쪽을 다 살릴 수 있다'

너는 이래서 좋고 너는 저래서 좋고...

아이들의 얼굴엔 평온함이

흰구름처럼 유유히 흘러가고요,
아이들의 마음은 솔바람되어

푸른 창공을 자유로이 날고요,
아이들의 눈망울은 

난향을 머금은 사랑의 물결로 넘실거립니다..

자리 자리마다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한풀 꺾인 부드러운 햇살 조명아래

더없이 고와진 나뭇잎들의 푸르름에 물들어

눈도 마음도 맑아집니다..

맑은 향기, 고운빛깔, 행복한 미소.

찻잔 속에 비친 파아란 하늘이 

가만히 우리를 올려다 봅니다...

 

 

그래요, 분별망상을 내려 놓고 가만히 세상을 바라다보면

무엇을 옳다고, 무엇을 그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여여한 것을...

무명에 어두운 저희들이 마음을 잘 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두손 합장하여 경배 올립니다._()_

 

글 출처 : http://cafe.daum.net/jungtobms/NCrC/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