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공부 ♡]/♡마음맑히기♡

지혜는 직관적이고 내면의 깊은 가슴에서 나온다.

혜등명 2006. 10. 19. 11:53

 

 

소피아는 지혜를 뜻한다.

지혜는 내면의 가장 깊은 성소에서 나온다.

지혜는 결코 꾸어 올 수 없다.

지혜는 지식이나 정보와도 관계 없고

경전이나 교리, 사상과도 관계가 없다.

 

지혜는 개인적이고 참된 체험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대는 존재를 알고 진리에 도달한다.

그것이 바로 소피아, 즉 지혜이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되풀이하는 것은 지식의 일이다.

무의미하고 생명이 없는 궤변이다.

그렇게 지식으로 자신을 치장하면

에고가 강해질 수는 있어도 진리는 알 수는 없다.

 

 소포스가 변질되어 소피스트가 되었다.

그것은 추한 일이었다.

소피아가 변질되어 궤변이 되었다.

궤변은 순전히 논쟁을 위한 논쟁일 뿐이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궤변에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언어적인 분석 행위이지,

직관이나 체험이 아니다.

 

 백날 추론하고 논쟁해서는 진리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란 논리적 추론 과정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논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진리로 가는 길은 논리가 아니라 사랑인 것이다.

지혜가 사랑이라면 지식은 논리다.

 

 논리가 '내가 진리로 가는 길이요, 문이다'라고 거짓 주장할 때마다

세상에서 진리가 사라진다.

 

 피타고라스는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야 했고 또 그렇게 해냈다.

철학이라고 하는 말은 지혜의 사랑이라는 뜻이지

지식의 사랑이란 뜻이 아니다.

이를 유념해야 한다.

철학은 지혜의 사랑이다.

지식은 지능적이고 지혜는 직관적이다.

지식은 머리에서 나오고 지혜는 가슴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지혜는 논리가 아니라 사랑이며

계산이 아니라 순수이고 교활이 아니라 지성이다.

 

 또한 피타고라스는 철학자라고 하는 말도 만들었다.

철학자라는 말은 지혜의 벗이라는 뜻이다.

타인과 논쟁을 시작하면 그대는 진리 자체보다는

자신의 에고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것을 관찰해 본적이 있는가?

때로 자신의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해도

에고 때문에 인정하려고 들지를 않는다.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위해서 논쟁을 한다.

상대의 주장이 틀렸기 때문에 상대를 논박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이겨야 하기 때문에 상대를 논박한다.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애고를 위해서 논쟁을 하는 것.

이런 논쟁이 곧 궤변 논자들의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추한 짓이 아닌가?

 

 그대가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치자

여인과의 사랑은 아름다운 경험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는 깊은 진리가 있고 향기가 있으며 축복이 있다.

사랑은 더없이 놀라운 신비다

하지만 성매매를 통해 남녀가 만나는 일은

그것과 같은 경험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보면 같을지 몰라도

영적으로 보자면 전혀 다른 체험이다.

성매매는 추한 것이요

사랑은 신성한 것이다.

철학은 사랑과 같으며

궤변은 성매매와도 같은 것이다.

 

 

-2006.10.18일자 [마음으로 듣는 음악] 

'위대한 만남을 통해서 인류의 진화를 도왔던 스승들을 만나는

<라디오로 듣는 책방>타임에서 녹취 함 / [피타고라스의 강의]편 - 

 

p.s) 정목스님의 맨트

1. 생사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과학과 신성을 일치시켜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느껴집니다.

 

2. 깨달음의 알맹이를 전해드리고자 읽어드리는데

듣고 깨닫는 것은 청취자 한 분 한 분의 몫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