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공부하는 그 수행의 깊이를 어떻게 점검하고 무엇을 따라 배워야 합니까?
그거야 간단하지요. 누가 화나게 해도 ‘허허’ 웃고 화를 안내면 그것 하나로도 공부가 된 것이지요. 누가 칭찬해도 ‘허허’ 하고, 천하 사람이 욕을 해도 흔들림이 없으면 그게 바로 공부가 된 사람입니다.
공부하는 목적이 고통의 그물을 벗고자 하는 것인데 누가 욕을 한다 해서 애끓으면 벌써 괴롭지요. 참다운 공부는 자기가 우주 전체를 정복하고 마음대로 요리해서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수행의 경지를 인가(印可)받는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참으로 깨달았다면 인가받지 않아도 스스로 압니다. 인가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가 참으로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를 검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서류가 완전해서 잘못된 것이 없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도장 찍어주는 것 아닌가요? 그렇듯이 도를 얻었다고 도장 찍어 주는 것이 인가입니다. 그렇지만 확철대오하면 스스로 알아요.
그러나 크게 깨닫지 못하고 자기 깜냥대로 깨달은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이 시원찮으면 큰 스승들이 다시 공부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런 인가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가 다 알도록 공부를 완전히 했다 하는 이름 있는, 말하자면 육조 스님 같은 큰 도인들이어야 하지요.
조사 스님들이 법을 전할 때 의발(衣鉢)을 주며 전법(傳法)하는 전통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인가를 받았다 해서 그 사람만이 불교를 다 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인가를 안 받았다 하더라도 투철히 수행한 사람도 있어요. 부처님도 누구에게서 인가받은 것이 아니지요. 자기가 꿈을 깨면 꿈 깬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인가를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시비할 건 못 되지만, 인가받지 않았다 해서 그 사람이 불법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형식도 의미가 있지만, 그 형식에 매일 때 우리가 범하기 쉬운 어리석음도 아울러 알아야 합니다.
사명 대사는 서산 대사의 뛰어난 제자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 대사께서 임진왜란 때 왜군의 격퇴를 위해 칼을 들었기 때문에 서산 대사께서 법을 편양 언기 스님한테 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우리에게 미운 마음이 없어도 어떤 다툼이 있었을 경우 법을 전수받는데 하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사명 스님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워서 법을 전수받지 못했으니 억울한 것 아닌가 하는 그런 말인가요? 그 물음 자체가 잘못된 물음입니다. 왜냐? 참마음의 행복은 무사무려(無思無慮)인데, 법을 전수받으면 뭐 하고 주면 또 뭐 할 건가요? 그런 말은 다 중생심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법을 전수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보통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럴 듯하고 옳은 소리처럼 들려요. 그러나 정신이 바로 든 사람이 들으면 그건 꿈같은 소리지요.
그리고 설령 서산 스님이 제자인 사명 스님에게 법을 전해줬다 해도 그게 또 사명 스님에게 좋을 건 뭐 있겠어요? 나는 내 부처이고 너는 네 부처입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쳤잖아요? 법을 전수하는 전통이니 하는 것은 다 가치 없는 수작입니다. 법제자로 인정받으면 뭐가 좋겠어요? 서산 스님의 법제자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그게 사명 스님의 인생에 무슨 보탬이 되는가요? 자기가 한 그대로 공헌이 있는 것이지, 누가 인정해 준다고 더 나아질 게 뭐가 있겠으며, 사명 스님이 언기 스님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명 스님은 인정을 안 받아 가면서 많은 생명을 건지고 이 나라의 권위를 보호했으니 그야말로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낫다고 말해도 누가 뭐라 말하겠어요? 전통적인 법의 전수도 마다하고 모든 허물을 다 덮어쓰고 민생을 구하기 위해 칼을 들었다면 그 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옳다는 그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우스운 소리입니다.
불교에는 그런 게 없어요. 본래다 다 부처인데 누구한테 인정받고 누구한테 법을 넘긴다는 그런 못난 소리가 어디 있어요? 그건 중생이 책에 쓴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책에 도를 인정받았다고 적혀 있다고 해서 뭐가 좋을 게 있나요? 부처가 인정해도 그것은 네 부처라는 소리입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쳤어요.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깨치라고.
참으로 그건 어린애 같은 소리입니다. 중생들이 워낙 어리석으니까 방편으로 그렇게 써놓은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다 부처입니다. 부처가 와도 부처는 네 부처입니다. 거기에 의지하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는 자기 안에 있는 본래 부처를 찾으라 했습니다. 어디에도 의지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 ‘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뚫을 기운이 있으니 여래가 간 곳을 따르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지하는 것도 병든 소리라는 말입니다. 불교는 다만 법을 의지할 뿐이지, 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선 공부한지 한 삼 년 정도 되었는데 그렇게 정진하다 보니 생각이 끊어져 버리고 텅 빈 자리를 경험했습니다. 텅 비고 다시 내가 있어야 하는데 나를 잃어 버렸으니 답답합니다. 이제 큰스님을 뵈옵게 되었으니 생각이 끝난 자리에서 깨달으면 얼마나 넉넉한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참선 공부를 하다 보면 텅 빈 자리를 느끼는 단계가 있습니다. 만약 허공처럼 비었다면 허공 자체는 말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니, 그 단계에서는 아무 말을 못하고 아무것도 몰라야 합니다. 하지만 텅 빈 자리를 경험한 후에도 마찬가지로 말을 하고 길을 걷지요?
분명히 비었지만, 빈 것을 아는 놈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아는 놈을 잘 처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줄 아는 놈이 있으니 ‘그 아는 놈이 무엇인고?’를 궁구하여 그 놈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텅 빈 데 그치어 그 상태에 빠져 있으면 안 되지요. 텅 빈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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