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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사들께서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달은 이는 중생이나 똑같이 평상심을 갖고 생활하는데 평상심이 도라 하니, 애써 깨달음을 구할 것도 도를 얻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 평상심에 대해서 말씀 해 주십시오.
평상심이란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고, 서고 싶으면 서는 즉,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도’라 하면 뭔가 기상천외하고 별스런 것을 떠올리지만 사실 특별한 게 아닙니다. 불법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니 세간을 떠난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보통 기쁜 일이 있으면 웃음이 저절로 터지게 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우울해지고 울음이 쏟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이가 기쁜 일이 있어도 웃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울지 않는다면 뭔가 부자연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웃는 것이 당연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눈물 흘리는 것이 당연하지, 시치미 뚝 떼고 웃지 않고 울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벌써 도에 어긋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시는 자재(自在)한 생활을 할 때 삶이 즐겁고 안온할 수 있습니다.
기탄없는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그게 바로 도입니다. 그러니 어른보다도 오히려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도심(道心)에 더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제 맘에 안 맞으면 발버둥 치며 울고 제 맘에 맞으면 금방 웃는데, 어른들은 벌써 때가 묻어 있어 자꾸 겉치장을 하려 합니다. 슬퍼도 안 슬픈 척, 좋아도 안 좋은 척, 서로 마음이 안 맞아도 맞는 척, 원수지간이라도 겉으로는 친한 척 전부 꾸밉니다.
꾸밀 때 벌써 도에 어긋나 버립니다. 꾸미고 허식 없는 마음 내기가 쉬울 것 같지만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자기 색으로 칠하고 자기의 안경을 덮어쓰는 등 자신을 가리고 삽니다. 가리고 산다는 것은 괴로움이 됩니다. 그러니 세상 살아가는 순리(順理)에 따라서 솔직하게 드러내고 사는 것이 바로 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살이 가시에 찔리면 아픈 법입니다. 그런데 아프지 않는 척 행동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벌써 허물이 됩니다. 우리는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익혀 온 버릇으로 평상심을 바로 못 쓰고 예의와 가식, 허울을 덮어쓰고 삽니다.
세상 사람들은 앞에서는 상대와 친한 척 하지만 뒤로는 원수마냥 헐뜯고 욕하고 처처에 시비가 끊이지 않습니다. 도인(道人)은 아무런 꾸밈도 없고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고 과장된 가식도 없습니다.
어떠한 꾸밈도 가식도 없는 곳, 자기 그대로를 발로(發露)하며 사는 곳, 그곳에 바로 평화로움이 깃들게 됩니다.
평상심이 안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자기 몸이 아프면 아플 뿐인데 그 아픔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면 평상심이 안 됩니다. 마음에 뒷그림자가 없어야 합니다. 아픔이 다가오면 아파하고, 슬픔이 다가오면 슬퍼하되 더 이상 마음속에 두지 말고 깨끗이 보내야 합니다.
맑은 거울은 검은 것이 앞에 오면 검게 비춰주고 흰 것이 오면 희게 비춰 줍니다. 거울 앞에 검은 것이 왔는데도 거울 마음대로 색상을 선택해서 다른 색으로 비추지 않습니다. 맑은 거울은 물체를 그대로 비출 뿐이며, 물체가 지나가면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생활을 거울 같은 평상심으로 살면 조건이 따라 붙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제 뜻에 안 맞으면 어떻게든 조건을 붙여서 갖은 모략을 하고 싸움질을 합니다. 도인은 뒷그림자가 붙지 않는 생활을 합니다. 괴로운 경계가 닥치면 그대로 맞아들이고, 또 그 경계가 사라지면 자기 마음속의 괴로움도 곧 사라지니 아무 상처도 받지 않게 됩니다. 마음 가운데 일물(一物)도 잔류(殘溜)하지 않으면 무심도인(無心道人)이지요. 무심이기 때문에 일체의 분별망상이 끊어져서 모든 중생을 내 몸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중생을 내 몸으로 보기 때문에 원수 갚을 곳도 없고 은혜 갚을 곳도 없습니다. 피아상(彼我相)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저 사람이 나를 불리하게 하니 원수 갚아야 하겠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지요.
부처님 당시, 유마 거사란 분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앓고 있자, 국왕에서부터 바라문, 거사들이 병문안을 다녀갔습니다. 하루는 부처님의 명을 받은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와서 물었습니다.
“언제 병이 낫겠습니까?” “일체 중생의 병이 끝나면 내 병도 낫습니다.”
‘일체 중생 어느 한 사람이라도 병을 앓는다 하면 어떻게 내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 마음이 바로 보살의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장보살님도 지금까지 지옥문 앞에 서서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옥이 엄연히 있고 중생들이 분명히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 편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평상심에 대한 이해는 마음으로 따지거나 짐작으로 생각해서는 어렵습니다. 완전하게 자기 마음을 습득할 때 이해가 되지, 깨닫지 못한 세계에서는 아무리 깨달은 세계를 이해하려 해도 깨닫지 못한 세계 밖에서 얼쩡거리는 것밖에 안 됩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논리적으로 밝게 따져 보았자, 그것은 결국 꿈 안의 세계밖에 못 따집니다. 꿈을 깨야 비로소 꿈밖의 세계를 논할 수 있듯이 자신이 미(迷)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따져 봐야 미한 세계의 테두리를 못 벗어납니다. 내가 깨닫기 전에는 절대 깨달음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납득이 된다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깨닫지 못한 저울대 위에 놓고 달고 있는 겁니다. 미한 저울로는 깨달은 세계가 절대 달라지지 않습니다.
팔만 사천 경전을 다 통독하고 달달 외워도 자신이 꿈 깨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미한 세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미한 저울대 위에서 노는 것밖에 안 됩니다.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확철대오로 깨달아 알 때 죽음의 문제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는 ‘이 몸뚱이야 어차피 백 년 안짝에 쓰러질 허망한 것이니 죽음을 당해서도 초연하리라.’라고 되뇌어도 자신이 실제로 생사 없는 도리를 보지 못한다면 막상 죽음에 닥쳐서는 두려워집니다.
우리가 설명 듣고 평상심을 느끼는 것과 직접 깨달아 느끼는 것과는 이렇게 천지 차이로 다릅니다.
『어디에도 걸림 없네』서암 큰스님 법어집, 정토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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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정토지 2008년 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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