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등명 2008. 3. 3. 11:07

修行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이네

 

최희선 / 서울

 

  뜻도 모르는 삼귀의를 읽고 외워지지 않는 반야심경을 억지로 외워야 했던 어린 시절의 불교는 나에게 달갑지 않은 종교였다. 아버지가 목탁과 천수경으로 아침을 깨우는 것이 싫었는데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아예 승복을 입고 다니셨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맡기시고는 친구 분이 주지로 계시는 절에서 함께 생활하셨다. 경제관념도 없고 자식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승복을 입고 다니시는 아버니가 싫어 골목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피해 다녔다. 어머니 역시 낮에는 일을 하시고 밤에는 철야정진 하러가기 일쑤여서 얼굴보기가 어려웠다. 나를 혼자 두는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집에서 나는 점점 말문과 마음을 닫았다. 그러던 1992년 어느 날 아버지가 위암 판정을 받고 1년 만에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위암이라는 병명과는 달리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하셔서인지 고통 없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에게 잘 하지 못했다는 후회로 나 역시 한동안 몸이 아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나는 서로 무관심하게 지냈다. 1남 4녀의 막내딸이지만 다정다감하지 않고 말수가 없는 내 성격 때문이었다. 나는 평일에는 직장을 다니고 주말에는 등산을 가고 방학에는 며칠씩 여행을 떠나며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어머니와는 남처럼 지냈다.

 

 

  나는 특수학교 교사다. 평소에 장애인에 대한 관삼으로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일상생활을 거의 하지 못하는 중증 뇌성마비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오줌이나 똥을 싸면 일일이 갈아줘야 하고, 늘 휠체어에 앉히고 내려야 했다. 그것이 허리에 무리가 되어 결국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나는 수술 받은 것이 인생의 걸림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재수술을 받아야한다는 말에 무거운 짐을 안은 느낌까지 들면서 아이들이 원망스러웠다. 그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속에 구겨 넣고 누가 알까 두렵고 괴로웠다. 그러던 중 같은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깨달읨의 장'을 다녀온 뒤 법당에 나오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몇 십 년을 들어도 몰랐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명쾌한 법문으로 귀에 쏙쏙 들어오고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갔던 절과 내 의지에 의해 다니는 절은 천지차이였다. 법문을 들으면서 어린시절 내가 달갑지 않게 여겼던 불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갔다.

 

 그리고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정말 고마운 일들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딴것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깊이 참회합니다.'라는 기도문을 받고 기도를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불법 인연 맺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회합니다."라는 말이 나오며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동안 아이들을 대하면서 '내가 한번 만져주면 좋아져야 하는데, 내가 돌보면 벌떡벌떡 일어나 앉아야 하는데' 하는 욕심 때문에 하루 이틀 사이에 좋아질 아이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아이들에게 화내고 짜증내고 원망했음을 알았다. 아이들은 그냥 제자리에 무심히 있는데 선생인 내가 안달복달을 했으니 허리에 무리가 온 것이 아이들 탓이 아닌 내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저녁법회부의 집전을 맡으면서 정토회 자원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싫어던 법복을 입고 목탁을 치면서 목탁 소리가 한 번 울릴 때 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 후 7개월쯤 지난 추운 겨울 날, 저녁법회를 마치고 집에 가니 어머니가 손이 저리다고 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러니 괜찮아질 거라고 했는데 새벽에 왼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심해졌다. 바로 병원으로 모셧으나 여전히 마비가 진행되면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을 하셨고 내가 24시간 간호를 했다. 그때까지 24시간 오로지 어머니와 지내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기에 어머니는 돈을 벌어야 했고, 공부해라 등의 잔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 딸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서 어머니가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어머니는 그냥 당신 삶에 최선을 다해 사신 것임을 알았다. 비록 힘들었지만 어머니와 24시간 같이 지내는 것이 좋았다. 중증뇌성마비 아이들을 휠체어에 앉히고 눕히는 생활에 익숙했던지라 어머니는 내가 요령 있게 간호를 잘해서 편하다고 말씀하시며 막내딸을 좋아하셨다.

 

 그렇게 병원생활을 하던 중에 병원비 문제로 다른 형제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올케는 경제활동이 없는 오빠 핑계와 아들을 뺏겼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에 대한 섭섭함으로 병원비를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큰언니는 내 전화를 피했다. 작은언니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위로의 말과 병원비를 조금 보내주었지만 그 나머지는 내 몫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큰언니 보증을 서면서 힘들게 모았던 적금이 날아간 일까지 생각나면서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화를 냈다. '모두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울면서 한탄을 했다. '내가 허리 아파가면서 번 돈인데 장녀가 돼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라는 생각에 이번에는 큰언니가 원망스러웠다. 기도를 하면서도 큰언니에 대한 원망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그러다 '돈은 그냥 돈일뿐인데 어디에 쓰이던 돈일 뿐인데, 허리 다쳐가며 번 돈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괴로움을 자처하고 있구나. 형부를 잃고 두 남매 데리고 혼자 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장녀라는 부담감에 병원비까지 부담을 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눈치를 봤을 언니를 생각하니 참회의 눈물이 났다.

 

 

  어머니는 전혀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좋아져서 퇴원하셨다. 어머니가 편하도록 새로 침대와 소파를 들여놓고 어머니께 잘해야지 다짐하지만 며칠을 잘 지내다가도 삐걱거린다. 국을 끓여 놓으면 한 끼 밖에 드시지 않는 어머니에게 "음식을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라고 잔소를 하면 "어머니는 질려서 못먹겠다." 하신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아침에 어머니가 싸 놓은 도시락을 뿌리치고 가져가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반찬이 좋을 리 없었고 반찬에서 머리카락이 나온 뒤부터는 도시락을 먹는 대신 점심을 굶거나 빵을 먹었다. 끓여 놓은 국을 한 번 밖에 안 드시고 끼니마다 반찬을 바꿔야 하는 지금, 어쩌면 그 인연과보가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웃으며 어머니를 이해하니 잔소리하는 횟수가 줄어간다. 화장실에 갈 때 신발을 안 신는 어머니에게 "신발을 신고 화장실에 가세요."라고 말하거나, 흙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오시는 어머니에게 "베란다에서 오실 때는 발판에 발을 �으세요."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그래도 '또 내가 고집을 부리는 구나. 고집 센 어머니를 고치려 하는 내 고집이 어머니보다 세구나.' 뉘우치면서 어머니와 알콩달콩 살아간다. 어머니의 그 고집이 없었다면 우여곡절 많은 살림을 꾸려가지 못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다 퇴근 후 집에 가서는 어머니 저녁식사 차려드리고 다시 법당을 향해 가는 바쁜 일과가 피곤 하지만 주무시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사랑합니다. " 라고 말할 수 있어서 좋다. 부처님 법 만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의구심을 가졌을 때 불법에 행복이 있다는 가르침이 막연했는데 이제야 여실히 깨닫는다. 나이 들어 결혼 못하고 있는 나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혼을 한든 안 하든 행복은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는 누구도 부럽지 않다.

 

  학교, 집, 법당 밖에 모르는 단순한 생활이지만 예전에 일어학원, 영어학원, 대학원, 해외여행 다닐 때 보다 훨씬 행복하다.

 

  내 안의 문제가 해결되니 '부족하지만 나의 장점인 단순함과 꾸준함으로 힘이 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을까?' 은혜 갚는 마음으로 나의 변화를 보면서 행복도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음일 깨닫는다.

 

- 월간정토지 2008년 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