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모양이 없기에 상처를 받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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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는 저마다 진리를 구하는 길을 내세웁니다. 불교에서는 그 진리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이켜 안에서 찾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안의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그 진리를 찾는다는 뜻인지요.
모든 것은 하나만 알면 다 알게 됩니다. 사실 ‘밖에서 찾는다, 안에서 찾는다.’ 그런 말부터 모순이지요. ‘불교에서는 안에서 찾는다.’ 하는 소리는 다만 외도(外道)들이 자기 마음은 놓아두고 바깥에 있는 조물주나 신을 쫓아 헤매니까 이에 반해서 불교는 바깥으로 헤매지 않고 자기중심을 갖고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말입니다. ‘안’이라는 것도 독립된 말이 아니므로 근본적으로는 안이 바로 밖이며, 밖이 바로 안이지요. 그러니까 외도들의 사상을 배격하는 상대적 논법으로 안과 밖을 말한 것이지, 엄격하게 따져서 어디 안과 밖이 있느냔 말입니다. 다만 자기중심 버리고 뚱딴지같이 바깥에서 신을 찾으니 그 소리를 배격하는 말로 ‘밖’이라 하는 것이지요.
인간 마음이 본래 부처라 하면 오염이 되어 중생이 되었는지, 아니면 본심은 오염이 안 되는 것인지요?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얘기하면, 어린아이가 나올 때 술잔을 들고 나온 아이가 없고 아편 중독 되어 나온 아이가 없어요. 나쁜 친구를 만나 놀다 보면 술 안 마시면 못 배기게 되고 아편에 중독되면 재산을 탕진해서라도 주사 맞으러 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누가 그것을 만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배 안에서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나와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누에가 스스로 고치실을 만들어 감겨 있듯이 전부가 자업자득입니다. 자기 스스로 한 거지요.
그러나 그런 중독에 걸려도 용기 있는 사람은 하루아침에 법문을 듣고 탁 털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새 사람이 됩니다. 그 모든 것이 한바탕 허공에 구름 일듯이 일어나는 겁니다. ‘본래 청정한 부처 자리인데 어째서 어지러운 세계가 일어나느냐?’ 화두에도 나옵니다. 내 말이 이해 안 되면 오늘 밤에 잠을 자지 말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본래 부처가 왜 이리 때가 묻었느냐? 이건 남한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깨쳐야 합니다. 아무리 설탕이 달다 얘기해도 설명만 들어서는 몰라요. 자기가 설탕을 집어 먹어 봐야 ‘아, 설탕 맛이 이렇구나.’ 하고 알듯이 자기가 체득해야지 말로는 안 돼요.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하는 것도 말로 전해 줄 것 같으면 하루아침에 다 이해되죠. 그러나 배워서는 안 됩니다. 의심을 한번 해 보세요. 깊이 의심하고 파고 들어가면 참으로 그 도리가 나옵니다.
각자가 마음을 따로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근본 마음은 하나인지요? 만약 각자 마음을 갖고 있다 하면 여러 개가 있을 텐데 그러면 마음이 늘었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인지요?
마음이 여러 개 있다고 해도 맞는 말이고 마음이 한 개도 없다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마음을 보세요. 남을 미워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 모략하는 마음, 칭찬하는 마음……. 이렇게 수천 가지 마음이 있으니 여러 가지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물에 파도가 일어나도 바람에 따라 똑같지 않거든요. 굵은 파도, 작은 파도, 모난 파도, 칙칙한 파도, 동그란 파도 등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일어나는 한 작용입니다.
그러나 근본 마음은 하나고 둘이고 숫자가 없어요. 가령 허공도 큰 허공이 있고, 작은 허공이 있고, 삐딱한 허공, 모난 허공이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생각해 봐요. 허공은 가없기 때문에 허공이 얼마나 크냐, 허공이 몇 개 있느냐, 이런 질문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도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고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몸은 모양이 있으니까 몇 개다 이러지만 마음은 모양이 없어요. 둥근 것도 아니고, 모난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고, 강한 것도 아니고, 부드러운 것도 아니고, 붉은 것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니고, 거무스름한 것도 아니고, 푸르스름한 것도 아니고 마음에는 일체 형상이 끊어졌다 이겁니다. 그것이 무슨 여러 개로 늘어나고 줄어들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모양 없는 이 마음은 천 개 만 개 포개도 모양이 없으니 서로 상처가 안 됩니다. 모양 있는 것은 조그마한 그릇에 큰 것이 담기지 않고 둥근 그릇에 모난 것이 담기지 않습니다. 모양이 있으니까 상처가 되지만 마음은 모양이 없습니다. 내가 마음 크게 쓴다고 해도 옆 사람 크게 쓰는데 장애가 안 되죠. 서로 모양이 없으니 내 마음 지나가는데 왜 네 마음병이 드느냐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있어도 내 좋은데 왜 내 좋은 것 네가 빼앗아 가느냐 그런 것이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천만 사람의 마음이 서로 하나도 구애받지 않아요. 그러니까 마음을 따지고 이해하는 일 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을 뭐라고 말할 수 없거든요.
마음은 모난 것도 둥근 것도 아닙니다. 본시 마음이 모가 났다면 다시 둥글지 못하고, 마음 그 자체가 본시 악하다면 다시 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체 형상이 없기 때문에 이놈은 둥글게도 쓰고, 모나게도 쓰고, 악하게도 쓰고, 착하게도 쓰고, 천하게도 쓰고, 천차만별로 일으켜 써도 아무 장애가 없습니다.
허공이 모양이 없기 때문에 둥근 것 갖다 놓아도 걸리지 않고, 모난 것 갖다 놓아도 걸리지 않고, 불로 태워도 그슬리지 않고, 칼로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모양이 없는데 상할 수 있나요? 그래서 ‘만약에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 그 마음을 허공같이 비우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망상을 다 여의고 근본 마음에서 보면 일체 거리낌이 없습니다. 지옥을 가든지 천당을 가든지 웃기든지 울리든지 상관없는 이 마음을 천 개, 만 개 있어도 상처가 안 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것이 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우주를 창출해 냅니다. 마음이 지옥도 건설하고, 천당도 건설하고, 도깨비도 건설하고, 귀신도 건설하고, 온갖 삿된 것도 건설하고, 착한 것도 건설하고 전부 마음이 그렇게 합니다. 일체유심조라, 모든 것을 마음으로 짓습니다. 참 묘한 것이 마음입니다.
이 세상 물건은 모양이 있어 서로 뺏고 싸우지만 마음은 전체가 한없는데 누구하고 마음 뺏으려고 서로 싸울 사람 있느냔 말입니다. 천 사람이 기쁜 경계에 웃는다고 해도 서로 웃는 그 마음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자기 웃는 데 방해되지도 않습니다. 천만 명이 같이 춤추고 노래한다고 해도 “왜 내 흥을 네가 빼앗아 가느냐?”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어요? 허공을 말로 재든지 저울로 달 수 없듯이 중생의 업력으로 일어난 생각으로 마음을 따진다는 것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만공 스님 회상에 갔더니 식량이 없다고 방부를 안 받더군요. 그래 식량이 없으면 내가 동냥 해오겠다고 하고는 동냥을 갔는데 청년들이 어른들하고 가을마당에 타작을 하다가 내가 동냥을 가니까 “야, 저 중 몇 근이나 되는지 우리가 달아보자.”라고 했어요. 그때 내가 고함을 한 번 벽력같이 지르고는 “우선 이 소리가 몇 근 나가는지 달아봐라.” 그랬지요. 소리가 몇 근 나가는지 달 수 있나요? 그렇다면 몸뚱이만 달아봐야 되겠어요? 몸뚱이에서 소리도 나오고 별 것이 다 나오는데 그것까지 달아야 될 것 아니에요. 그러니 그 단다는 것이 자기네가 달수가 없잖아요. 그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 세계는 누구도 묶어갈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본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어디에도 걸림 없네』서암 큰스님 법어집, 정토출판
-월간정토 2008년 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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