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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생명의 문제로 봐야 (펌)

혜등명 2008. 1. 15. 12:03

[수경스님 칼럼]‘사람의 길’을 찾아서
경향신문 / 입력: 2008년 01월 14일 18:19:03
 

사람이 살아가야 할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더 여유로운 삶을 위해서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다들 행복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겠지요.

저에게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출가를 했고,

그것을 위해서 저의 스승이신 부처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약속이 불살생(不殺生)입니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무서워한다.

내 생명에 이를 견주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법구경(法句經)의 말씀입니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제가 아는 자비와 사랑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자비의 ‘자(慈)’는 우리말로 ‘사랑’으로 새깁니다.

그런데 이 말을 추상적인 사랑으로만 이해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 종적이 막연해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慈)는 팔리어 ‘우정(Mitts)’에서 온 말입니다.

우정이 무엇입니까. 평등이자 연대입니다.

더불어 행복한 관계에서 나오는 순정한 마음입니다.

‘비(悲)’는 무엇입니까? 나 아닌 생명의 불행을 진심으로 아파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원수마저도 없는 것이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대운하’ 생명의 문제로 봐야-

한반도 대운하 문제로 논란이 많습니다. 그 핵심은 경제성과 환경의 충돌입니다.

하지만 저는 경제와 환경을 상충의 관계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연을 아끼는 일은 궁극적으로 경제적일 것이라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경제 타령입니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논리의 대부분도 경제적이지 않다는 데 초점을 둡니다.

환경을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반대를 위한 반대이고,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고 매도

됩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생명의 문제’로 대운하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대운하의 문제는 찬반이나 호오를 넘어선 것입니다.

대운하 논란은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바람직한 측면도 있습니다. 진짜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성찰할 계기를 주니까요. 그래서 제 삶을 돌아봤습니다. 슬펐습니다. 무력한 제 자신이 야속했습니다.

지금 저에게 중요한 것은 한반도 대운하 반대가 아닙니다. 과연 우리가 수많은 생명을 해치며

강과 산을 허물어야 할 만큼 가난한지, 그것이 아니면 다 굶어 죽기라도 하는 것은 아닐 텐데,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더 많은 돈을 벌어야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가 안타까울 뿐

입니다.

저는 지금 따뜻한 온돌에 등을 붙이고 편안히 잠을 잔다는 일이 죄스럽습니다. 우리 사회가 온통 더 많

은 돈만 벌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허상을 좇는 현실이 두렵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저의 행동은 논리적, 이성적 판단의 결과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이

아파하는 현실을 그냥 지켜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근원적으로 뒤집힌 생각이

절제도 금도도 없이 질주하는 현실을 어떻게 그냥 지켜 볼 수 있겠습니까? 저의 몸과 마음이 이것은 아

니다, 설사 비난을 받더라도 아니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마저도 행동하

지 않는다면, 모든 생명과 기쁨도 슬픔도 나누자던 출가의 서원은 거짓이 되고 맙니다. 제 삶은 위선이

되고 맙니다. 저에게 자비는 상식이나 양심과 같은 말입니다.

대운하 문제는 차라리 작은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상이 아닙니다. 그래도 먹고 살 만한 사람

들이 입만 열면 “살기 힘들어 죽겠다”고 합니다. 정말 어려운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겨를도 없습니다.

사교육비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질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데, 특목고와 자율형 사립고의 설립을 말

합니다. 그러면 그런 학교에 들어갈 머리도 안 되고 가정 형편도 어려운 아이들은 어찌할 것입니까. 상

위 5%만이 삼성전자나 공무원 같은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고 나머지는 평균 임금 88만원으로 살아

가야 한다는 20대들은 또 어찌할 것입니까? 대운하만 파면 그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요? 우리 모두는 그

것은 아닐 것이라는 걸 잘 압니다.

진정 문제는 대운하도 아니고 경제도 아닙니다.

대운하는 이미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독단적 전제의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빈곤(빈부 양극화)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란 무엇입니

까? 간단히 말하자면 ‘공정한 분배의 룰’을 정하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니 외국

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정치는 없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의 과정을 보십시오. 그나마 한국 사

회를 이 정도로 만들어온 동력은 열정적인 정치적 관심이었습니다. 다만 불행한 것은 소위 민주화 세력

의 무능과 방종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유일신에게 맥

없이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입니다.

50년대까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는 거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구에 의해 에베레스트가 정

복된 이후 히말라야가 상품으로 바뀌고, 외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거지가 생겨났습니다. 흔히 우

리가 보릿고개를 떠올리면서 ‘그때가 그래도 좋았지’라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다고 저

는 지금 옛날로 돌아가자거나, 성장이 분배의 크기를 키울 것이라는 주장마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

다. 반대의 경우, 노무현정부가 평등과 분배만을 강조했다는데, 정말 그랬던가요? 말뿐이었지 않습니

까. 결과적으로 게도 구럭도 다 놓치고 말지 않았습니다.

-바랑을 다시 꾸려야 할듯-


최고의 부(富)는 무엇이냐고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만족을 아는 것이 제일의 부(知足第一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살 만한 사람들조차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모두를 모두의 경쟁상대로, 적으로 내모는 인간 소외의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이겠지요. 과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장 국민소득 4만달러가 되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그때도 우리들이 할 일은 세 끼 먹고, 싸고, 사람들과 아옹다옹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평화로운 삶이 아닐까요?

국내총생산 1위인 부자 나라 미국인의 행복 지수는 17위이고, 국내총생산 13위인 한국은 56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질’입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지수’는 물론이거니와 행복에 대한 감성에 굳어버렸

습니다. ‘행맹(幸盲)’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부처님과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떠올려 봅니다.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자명합니다. 살생을 하면 단명(短命)과 다병(多病)의 과보를 받는다 했습니다.

땅과 강이 파헤쳐지고 그 안의 뭇생명들이 신음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제 양심이, 가서 함

께 아파하라고 합니다.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바랑을 꾸려야 할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길을 걸으며 길을 찾아야겠지요. 하지만

저에게 당장 절실한 일은 대운하 반대가 아닙니다. 그런 거대한 반생명의 궁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세상의 아픔을 온전히 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약하고 여린 것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정녕 약자를 배려하고 만생명과 더불어 행복해

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사람답게 사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겠지요.


〈수경스님/화계사 주지〉

 

출저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141819031&code=990000